전쟁의 배경
일본이 항복을 하고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연합군은 ‘국제 신탁통치’와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전제로 한반도의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을 했습니다.
단일국가 였지만 남쪽과 북쪽을 구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북위 38도에 경계선이 그어졌습니다. 공통의 역사와 언어를 가지고 하나로 뭉쳐져 있던 우리 민족은 뜻하지 않게 갑자기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한반도에서 공동 투표 실시를 거부하면서 남쪽과 북쪽, 두 점령지 간의 통일을 위한 노력에 제동이 걸렸고 기회가 사라지게 되면서 더 많은 불행이 뒤따랐습니다.
남북 분단의 결과로 남쪽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주의가 북쪽에는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주의 독재가 자리잡았습니다. 각 정부는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북한정부는 남쪽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지지 했고 38도선 근처에서 소규모 접전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전쟁과 평화 사이의 균형은 언제라도 깨질 듯 했으며 한반도에서의 긴장감은 높았습니다.
6.25 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어느 여름날 새벽, 공격이 시작되었다. 서울과 인천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가는 주요 도로와 회랑의 여러지점에 공격이 집중되었다. - 한국전쟁, 매튜 리지웨이 저-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 7만 5천명이 대한민국을 향해 38도선을 침공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길고 긴 장마와 함께 비극적인 전쟁도 시작되었습니다.
사진설명. 로이 애플맨 저’ 미 육군, 한국전쟁에서 남쪽으로는 낙동강에서
북쪽으로는 압록강까지 아우르다’ . (워싱턴 DC.미 육군 군사 박물관)
북한의 남침은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 사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침공은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었지만 한국이 가장 약한 시점에 공격이 이뤄졌습니다. 침공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북한의 군사화와 무력증가에 대한 우려가 빈번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국제 사회는 북한의 위협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공산주의 독재자 김일성이 있었습니다. 야망이 넘치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한반도를 공산주의라는 붉은 깃발 아래 강제로 통일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지지해 달라고 간청을 하였고 민주주의의 대패를 약속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과 한민족, 미래의 운명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7월 5일, 오산 전투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에 의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평화의 침해행위를 구성한다고 판단하면서,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하면서,
북한 당국에 즉각 38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촉구하면서,
유엔 한국위원단의 보고서에서 북한 당국이 적대 행위를 중단하지도 않았고 38도선으로 군대를 철수하지도 않았으며,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긴급한 군사 조치가 요구된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대한민국이 평화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조치를 유엔에 호소하는 점을 유의하면서,
유엔 회원국들이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해당 지역의 안보를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원을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한다.
- 1950년 6월 27일, 유엔 결의문 83(1950) -
한국전쟁의 초기단계에서는 남한에 불리했다.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미군이 한국에 처음 도착하는 데는 일주일이 걸렸다.
국제적인 지원이 한국에 직접 닿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미국과 UN이 한국을 도울 것을 밝혔지만 대규모 군사지원이 가능하기 까지는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UN은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에 21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 군대인 유엔군 사령부를 조직하게 됩니다.
오산 전투는 한국전쟁 최초의 주요 전투 중 하나였으며 미군과 북한군 사이의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북한군은 남한의 방어진지를 무너뜨리고 남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찰스 브래드포드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 중령은 인근 일본 제21보병 연대에서 급히 파견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한 최초의 미군인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목표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오산으로 향하고 있는 북한군 병력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오산은 결전지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북한의 보병과 탱크부대는 한반도의 남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주요 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능선들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곳은 방어에 적격인 곳으로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가 이곳에서 시간을 벌면 미군은 지원군을 동원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북한군의 걸음을 일곱시간 늦추는 대가로 60명의 전사자, 21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82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오산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전략적 후퇴를 한 후 원래 있던 부대원의 40%에 해당하는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오산전투는 두 가지를 시사합니다. : 첫째, 미군의 단순한 주둔만으로는 북한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불충분했다. 둘째, 더 많은 화기와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더 이상의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으면 한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 월튼 워커 중장,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
1950년 8월과 9월 무렵에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8월초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났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혹은 ‘부산교두보’ 또는 ‘워커라인(Walker Line)은 남해안의 마산에서 시작되어 주요 항구도시인 부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낙동리 까지 160km,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산악지대 약 80km를 연결하는 선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이야기 합니다.
남아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부산교두보 혹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불리는 전선을 유지하거나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희망은 영원히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국군과 UN군은 앞으로는 적군과 맞서고 뒤로는 바다를 등지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시간싸움이 되었습니다. 시간을 늦추려는 자들과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사람들; UN군은 지원군이 부산에 도착함에 따라 서서히 보급품과 군병력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복해서 집결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쟁취하는 편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게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8월 말이 되자 북한군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보급품은 떨어져 가고 UN군의 증원, 공중과 해상에서의 UN군의 지배력 강화는 불안을 가중시켰습니다. 북한군은 8월말까지 필사적인 마지막 시도로 낙동강 방어선 5개 지점에 집중공세를 계획했습니다. 9월 1일 북한군은 마산, 경주, 대구, 영천 등의 주요도시와 낙동강 일대에 집중포화를 시작했습니다.
국군과 UN군은 굳건히 버텨 9월 15일에 마침내 승리를 거뒀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는 북한군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북한군의 초기의 불같은 전투력을 빼앗았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모든 것을 역전시켰습니다. 북한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국군과 UN군은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선에서의 전투가 한창일 때 또다른 작전이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의 잠재력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만약 작전이 성공한다면 부산 외곽에서의 작전이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되고 효과적으로 북한 인민군을 절반 가량 줄이게 됩니다. 더 나아가 북쪽으로 진격할 발판을 삼을 수도 있게 됩니다.
인천이 상륙작전의 강력한 후보지로 떠올랐습니다. 수도 서울과 그 당시 유일한 공항이었던 김포와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반격을 하기에 이상적인 위치였습니다. 극비리에 수행하기 위해 상륙작전의 암호명은 전투와 아무 상관없는 크롬 광석에서 따와 ‘크로마이트 작전’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자연환경이 상륙작전을 방해하는 강력한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한가지로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무척 큽니다. 그 차이가 최대 8.8미터에 달해 해안선에 접근할 수 있는 기간이 매달 3일로 제한적이고 이는 작전 기간도 한계가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로 북한 인민군의 해안포대가 위치한 월미도가 인천항을 감싸는 형세입니다. 지대도 높으니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한층 더 낮아 졌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성공할 가능성이 “5000 대 1의 도박”이라고 평했습니다. 이렇듯 기회가 적어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전과정을 한 달 안에 마쳐야 했습니다.
1950년 9월 13일 인천 상륙작전의 초반 해군의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9월 15일 미 해병대 제 7 보병사단이 한국군과 함께 월미도에 상륙했습니다.
2주 뒤 서울은 자유대한민국으로 탈환되었고 북쪽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 방어선도 마찬가지로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뛰어난 계획과 함께 한국군과 미군이 주축이 된 UN군의 용기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한국군과 UN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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